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문단 편집) == 활동 == [[임진왜란]] 때는 [[가토 기요마사]][* 그나마도 의병장 [[정문부]]와 [[곽재우]]에게 크게 패했고, 임진왜란 육군 마지막 전투인 [[울산성 전투]]에서는 울산성을 방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조명연합군의 울산성 고립 전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다.]의 활약과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 등에서 활동을 보이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다만 두 전투의 경우 조선군의 상황이 말이 아니었기에 별것 아닌 것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특히 두 전투의 주역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가토 요시아키]] 둘 다 [[이순신]]에게 당함으로써 더욱 과소평가되기도 하지만 [[용인 전투]]의 패배로 한양 탈환은 1여년이나 더 후로 마루어지는 동시에 조선의 남부지방 장악력이 공중으로 떠버렸고, [[칠천량 해전]]으로 수군이 괴멸 상태에 빠지고 정말로 멸망 직전까지 갔다는 것을 보면 결코 폄하할 수 없는 이들의 대성과이다. 조선으로선 천만다행으로 두 전투 다 [[이순신]] 의 활약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칠본창의 우두머리 격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임진왜란 초기 제5군을 이끌고 가토의 2군이 함경도 쪽으로 진출할 때 후방을 맡아 2군을 지원하는가 하면, 전쟁 와중에 경상도와 충청도 등을 돌아다니며 (전국시대 국내전 관행대로) 약탈, 학살 등 온갖 횡포들을 부리다가 경상북도 영천에서 [[권응수]] 장군과 싸운 전투에서 패해 영천성을 빼앗겼다. 이후 별 다른 큰 소득을 얻지 못하다가 명나라와 왜가 강화를 맺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출병했던 가토 기요마사와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달리 후쿠시마는 조선에 다시 출병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공격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오와리국 영주 지위를 받았다. 말년은 대부분 좋지 않았다. 전후 [[세키가하라 전투|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서 싸우는 과정]]에서 히데요시의 충복들이었던 만큼 일부는 서군에 합류했다 패망했고, 동군으로 합류한 인물들도 단지 미츠나리가 싫어서 미츠나리를 제거할 목적으로 합류한 거라 전후에도 노골적인 親도요토미 행보를 보인 탓에 숙청[* 물론 워낙 한가닥 하던 인물들이고, 동군을 승리로 이끈 전과를 인정하여 당사자를 직접 숙청하진 않았다. 칠본창 본인들이 죽고 그 후손들에게 알음알음 보복성 압력을 가해 서서히 집안을 몰락케 했다. 이들에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승리는 장기적 차원에서 [[피로스의 승리]]가 된 셈이다.]당했기 때문이다. 칠본창 멤버 중 [[와키자카 야스하루]]만 제대로 살아남았는데 원래부터 親도쿠가와 파벌이었으나 미츠나리 측이 와키자카를 무리해서 붙잡던 경우라 가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